“ 김포는 어디가 볼 만해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어디가 볼 만한 지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모르겠네요”가 거의 대부분이다. 김포의 인구가 한강신도시 개발을 기점으로 10년 만에 인구가 21만에서 45만 명으로 급격하게 늘었다. 김포에 속해있는 배드타운들의 중심지가 각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사우동, 장기동, 운양동, 구래동 다른 동네마다 번화가가 따로 조성되어 있다. 얼핏 보면 서울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평범한 동네와 다름없어 보인다.
작년 여름 내가 김포로 이사 왔을 당시만 해도 이 도시의 이미지는 김포공항(실제 행정구역은 서울시 강서구다.)과 김포평야로 대표되는 논, 밭의 풍경, 그리고 강화도로 갈 때마다 김포 부근에서 차량정체로 수시간 동안 막혔던 기억 등 뭔가 뚜렷한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서울과 인천이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도시에 끼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경향도 있고, 구 도심인 사우동에 특별한 매력이 없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쓰기로 결심했을 때는 김포를 어떻게 엮어 가야 하나 고민도 많이 되었다. 이 도시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정처 없이 계속 걷고 다녔다.
내가 평소에 출퇴근할 때 한강을 따라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 김포한강로를 이용하다가 문득 용화사 ic 표지판을 보고 궁금증이 일어났다. “왜 절 이름이 ic로 쓰이는 거지? 김포에 유명한 사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ic로 쓰일 정도면 평범한 절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용화사로 방향을 틀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입구에서 꽤 큰 규모의 현대적인 요양원과 넓은 주차장 구석에 위치한 옹색한 일주문이 큰 기대감을 실망으로 바뀌게 만들었다. “그럼 그렇지... 규모가 커서 안내판에 적힌 거로군” 축 처진 어깨와 함께 다시 차량으로 돌아가 가던 길을 재촉하려고 할 때 앞에서 거대한 한강의 물결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일주문을 바라보니 절 위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훌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발길을 돌려 일주문을 지나 언덕을 힘껏 오르니 어느새 한강의 장대한 풍경이 나타나고 크거나 고색창연한 절은 아니지만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콘크리트 숲으로 덮인 한강의 모습과는 다른 탁 트힌 강과 산의 모습들과 함께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아른거렸다.
“바로 이거다!!!” 김포는 어쩌면 한강에서 시작해서 한강으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김포의 파편들을 한강을 중심으로 모아서 이야기를 펼쳐 보고자 한다.
※ 용화사 : 제방도로를 타고 강화 방면으로 가다가 누산리 평야가 시작되는 지점의 좌측,운양산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사찰로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로 일산 신도시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절의 창건 연대는 대략 1405년(태종 5)으로, 뱃사공인 정도명이 조공을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간조로 인하여 운양산 앞에 배를 대게 되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대어놓은 배 밑쪽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 하여 이를 모시고 자신도 삭발 수도하게 되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동서로 50m, 남북으로 30m에 이르는 대지 위에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용화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팔작지붕으로 된 기와집이다. 주간포는 각 2개씩 배치되어 있고 창호는 4분 합의 띠살문이다. 5층 석탑은 높이 약 5m에 달하며, 회백색 화강암 재질로써 옥개 받침은 5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화전의 상단에 모셔져 있는 석불은 용화사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미륵석불로 조선 초기 불상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2004년 8월 김포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김포에서 북한이 이렇게 가까웠었어?” 많은 사람들이 김포가 북한과 접경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열에 아홉은 무척 놀라면서, 어떨땐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김포에 온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철책선과 군시설물들이다. 용화사에서 한강의 풍경은 가릴 것 없이 확 트여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밑을 관찰해보면 철조망도 촘촘히 박혀 있고, 100m마다 서 있는 망루가 군사적 긴장감을 들게 만드는 왠지 모르게 위축된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다.
한강을 따라 철조망 사이에 신기한 파란색 표지판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평화누리길 1코스라 써진 글씨는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너희들의 환영한다는 화해의 제스처 같아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 평화누리길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해보았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5월 8일 개장된 DMZ 접경지역인 김포, 고양, 파주, 연천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걷는 길이고, 무려 총 12개 코스 189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다. 다 돌아볼 염두는 나지 않았고 김포에 있는 3개 코스 중 일부 포인트 위주로 맛만 보기로 했다. 김포에서 출발하는 코스라 그런지 1코스부터 3코스까지가 김포를 거쳐가게 되는데, 김포의 유명한 명소 포인트를 거쳐가니까 김포 여행도 덤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인기 있는 트래킹 코스라 그런지 관리는 생각보다 잘 되어있어서 자전거나 도보로 지나가는 여행자들도 종종 보았고, 온라인상에 카페도 있고 해서 수시로 유실 정보 등 최신 소식을 알 수 있다.
우선 출발지인 대명항으로 먼저 가보자.
김포를 대표하는 항구이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철마다 새우를 먹으러, 꽃게를 사러 오는 곳 마을이 대망(이무기)처럼 바다를 향해 굽이쳐 있다고 해서 대명항으로 불리는 곳, 규모가 큰 항구는 아니지만 수많은 어선과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강화도의 풍경이 이번 여행의 애피타이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건너편에서는 “여기는 전방에서 가깝습니다.” 속삭이듯 군함들이 모여있는 함상공원도 함께 위치해있다.
조금 긴장감이 들었지만 어디선가 새우를 튀기는 고소한 향기가 내 코끝을 자극한다. “여기가 그 유명한 대명항 원조 맛집! 수철이네 본점입니다” 유명하다는 문구에서부터 엄청난 자신감이 느껴졌고, 원조라는 말을 쓴 것을 보니 유사품이 성행하거나 프랜차이즈업을 하고 있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었다.
검색창에 가게 상호명을 쳐보니 역시나 경기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게가 있는 프랜차이즈라는 걸 알고는 조금 실망도 했지만 이런 조그만 한 구석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분점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여기는 맛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냉큼 가게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가게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평범했지만 뭔가 깔끔하고 세련되 보이는 느낌이다.
나는 주로 식당에 갈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이 뭔가 낡았어도 조금 관리가 된 것을 보면 최소 주인이 음식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떡볶이에 새우튀김 세트를 주로 팔고 있는데 맛은 특별한지 잘 모르겠지만 기본에 충실했고, 대명항에서 시작한 스토리가 있어서 이야기의 맛까지 더해지니 어느새 떡볶이와 새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니 출발도 하기 전에 졸음기가 밀려온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다시 다음 목적지인 덕포진을 향해 항구를 벗어나니 차도 다니기 힘든 시골길이 나타나고, 강화도를 마주 보면서 철책길을 따라 행군하니 다시 군 복무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파란색 실선을 따라가며 다음 목적지로 천천히 걸어가본다.
철조만 너머에 있는 강화 사이의 해안가는 마치 강처럼 폭이 넓지 않기에 염하(鹽河)라고 불리기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이 좁은 해협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이 바다를 방어막 삼아서 항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에서 오는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기도 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군대 주군지 돈대가 물길을 따라서 산재해 있는데 크기에 따라진(鎭)과 보(堡)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위치해 있다. 그중 바로 김포에 위치한 돈대가 바로 지금 가고 있는 덕포진이다. 바로 건너편의 강화에 있는 초지진을 마주 보면서 수많은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항한 치열한 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위치 자체가 서울로 넘어가는 주요한 거점에 있기도 하고, 여기가 함락되면 서울까지 별다른 장애물이 없기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 것 같다. 이미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철조망을 볼 때마다 아직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가, 나, 다 군으로 이루어진 포대와 파 수청터, 손돌 묘까지 한 번에 돌아보는 트레킹 코스로 되어 있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돈대로 올라가 본다.
언덕에 오르니 싱그러운 풀의 향기가 밀려오고, 사방에는 수많은 여치와 메뚜기들이 뛰어놀면서 나를 반겨준다. 어느덧 흙으로 덮여서 잘 보이지 않았던 포대의 위용이 한눈에 드러난다.
강화도 쪽에 위치한 돈대들이 돌로 된 두터운 성벽으로 만들어진데 반해서 덕포진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밖에서 보면 눈에 띄지도 않고 위압적인 위세도 전혀 없지만 토성 안의 12개의 포대에 의지해서 조상들이 그 무서운 프랑스, 미국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우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1980년 포대 ·돈대 및 파수청(把守廳) 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지금은 풀밭으로 덮인 여기 땅 속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못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다시 햇빛을 볼 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프랑스, 미국과 벌인 전투인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에 대해서는 강화도를 가면서 자세히 보기로 하고 위쪽으로 더 올라가 보기로 한다. 앞에서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를 붙잡고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보소 젊은이.... 억울한 노인네의 얘기 한번 들어볼 텐가? 나는 손돌이란 뱃사공인데 지금으로부터 어연 천 년 전의 사람이지” 얼핏 옛날 만담 집이나, 소설에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라 귀신의 이야기를 무언의 끄덕임으로 경청을 하게 되었다. “나는 원래 여기에서 초지(강화도 초지진 부근)까지 사람들은 싣고 나르는 뱃사공이었다네 육지에서 섬까지 지근거리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물살이 세고 거칠어서 건너기가 쉬운 편은 아니라네.....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왕과 신하들이 어찌나 급하게 내려오던지 말도 말게 허허허 이 늙은이는 그저 전하와 나으리들을 물길을 따라 안전하게 모시고 싶었을 뿐인데 몽골의 앞잡이(첩자)로 오해받아 죽게 되었다네 흑흑 후에 나의 충정을 인정받아 임금이 이렇게 무덤도 만들어주고 제사도 지내고 한다네 나야 그냥 흘러가는 민초로 살다 갔지만 자네는 자네만의 길을 잘 걸어가 보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 다음 고개를 드니 어느새 노인의 형상은 사라지고 청초한 봉분이 눈 앞에 서있었다.
나도 손돌처럼 한 사람의 민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바람이 불면 먼저 흔들리고, 아예 드러누울 수 도 있다. 손돌을 죽였던 왕은 강화섬에서 끝내 나오지 못하고 지금까지 산 자락 한 구석에 묻혀 있지만 손돌의 묘는 높은 곳에서 강화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지나다녔던 해협은 지금까지 손돌목이라는 지명으로 살아 남아 민초의 끈질김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손돌의 묘 앞에 서서 절을 올리고는 천천히 철책선을 따라 길을 나섰다.
철조망이 있고, 흙길이라 먼지가 풀풀 흩날리기도 하지만 건너편 염하(鹽河)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여기가 김포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잔잔하고 고요했다. 들리는 것은 새의 울음과 나의 숨소리 발걸음뿐, 어느덧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연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어느덧 건너편 산자락에서 돌로 된 성문이 우뚝 솟아 나를 맞아준다. 드디어 문수산성에 도착한 것이다. 문수산이라는 이름은 사실 흔하다. 아마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유래되었을 터인데 김포뿐만 아니라 내가 예전에 살던 울산에도 있고, 용인에도 문수산이란 지명이 있다고 하니 흔하디 흔한 산 이름이지만 이 산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문수산성이란 성곽 때문이다.
국방을 중시한 조선 숙종에 의해 1694년에 지어졌으며, 특히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엄청난 격전지였다고 한다. 이때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지금은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섰으며,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성문은 남문으로 2002년에 복원이 완료된 복제품에 불과할 수 있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더욱더 구체화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문수산성의 진면목을 알려면 문수산을 등산할 수밖에 없기에 머뭇거림이 조금 있지만 여기까지 온 게 너무나 아쉬워 품속에 아껴둔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물며 오르는 첫 발을 내디뎠다.
내가 어렸을 땐 등산을 무척 싫어했었다. 힘들게 오르는 행위도 왜 쓸데없는 고생을 자처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고, 특히 산에는 모기와 벌, 파리 같은 벌레도 득실거리고 바닥은 돌이나 진흙으로 뒤덮여서 신발이 성할 날이 없었으며 기껏 힘들게 올라와서는 올라온 만큼 힘들게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 드니 약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고개를 들일 보다 숙일 일이 많다는 사실, 항상 누군가로 인해 마치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평가를 항상 받아야 한다는 점, 항상 조리당하고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 산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자연이 되어 호쾌하게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며 이 순간만큼은 권력자의 감성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산 중턱에 올라보니 어느새 시야를 가렸던 나무숲은 사라지고, 김포 땅과 강화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김포 땅이 생각보다 넓어서 그런지 아무리 신도시가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넓은 산과 들판이 남아있어 이 도시만의 매력이 아닐까 했다. 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드니 산 능선을 따라 나지막한 성벽이 정상을 향해 뻗어있어서 산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큰 숨을 들이쉬고는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욺 겨본다.
비록 376m의 낮은 산이지만 꽤 경사가 급하고 능선도 길어서 오르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돌을 손에 메고 산에 올랐던 민초들을 생각하며 한발 한발 내디뎌 본다. 성벽의 높이는 생각보다 높지 않다. 하지만 천연 성벽인 이 산에 의지하여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이겨냈었고, 지금까지 굳건히 김포의 산하(山河)를 내려다보고 있다. 성벽과 나란히 걸으면서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 당시의 장군과 병졸이 되어보면서 적군을 맞이하는 상황을 맞이해보니, 병졸들의 이마, 손, 발에서 흘렸을 긴장과 땀, 장군들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 심정, 마을을 버리고 성벽으로 도망쳐 숨어 지내던 백성들의 두려움과 원망 모든 것들이 나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어느덧 산 정상이 보이고, 둥그런 성벽으로 둘러싸인 장대(將臺)의 위용이 어서 오라고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산 정상에 위치한 장대(將臺)는 전시에 장군들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는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2척의 함정과 해전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150명의 병사들로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3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만 남기고 철수하게 되었고,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넘어가 산 부근의 일부 성벽만 남고 해안가를 비롯한 성벽 시설물들이 무너지거나 불에 타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장대위에 서서 북쪽을 바라다본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북한 땅이 눈에 아른거린다. 저 앞에 보이는 개성 땅에는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가 남겨져 있을 것이다. 미완의 여로로 남기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간다.
벌써 해는 중천을 지나 석양을 향해 가고 있고, 나의 피로감은 극도로 달해 산 아래로 푹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지나왔던 역사의 현장이 가볍지만은 않아서 더욱 무게감이 느껴진지도 모른다. 무엇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역사의 무게만큼 무거운 발걸음을 했으니, 비교적 빠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칼국수 집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같은 여행자 부류는 왠지 청개구리 같은 습성이 있어서 무겁다가도 가벼운 것을 추구해야 하고, 그날 점심에 해산물을 먹으면 저녁에는 고기를 섭취해야 하는 법 바로 근거리에 위치한 <<연호정 칼국수>>가 이런 나의 조건에 부합하는 식당이다.
항상 음식점을 찾아갈 때 혹자는 미리 조사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자기의 감과 기준에 의해서 즉석으로 찾은 가게도 많을 텐데 나는 전자에 속 하는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전자가 높을뿐더러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sns에 유행하는 트렌디한 식당은 약간 한철 장사의 기운만 남아 음식에 영혼이 없어 보인다. 10년 이상 꾸준히 유행하는 스테디셀러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의 맛과 이야기가 곁들여지니 음식의 맛도 더욱 살아난다. 유명하다는 버섯 샤부샤부 칼국수를 후루룩 삼키면서 생면의 거친 식감과 미나리의 상큼한 맛과 느타리의 향이 함께 나의 입으로 들어와 쌓였던 피로와 함께 내려간다. 여행은 오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며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좀 더 힘을 내보기로 한다.
한 여름의 해는 유독 길어 저녁 6시가 지나도 좀처럼 석양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오늘 여정의 마지막을 한강변의 한 항구에 가서 마무리 짓고자 한다. 한강 하구의 제방도로를 따라 한쪽으로 내려가면 철조망이 사방으로 둘러쳐 있고 군부대 초소와 공존하는 기묘한 형태의 어항을 맞이하게 되는데 한강 최북단 항구인 전류리 포구(浦口)라고 한다.
평소에는 항구는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고, 철문 옆엔 군 초소가 위치해 이 곳이 북쪽에서 멀지 않은 장소임을 실감하게 된다. 군부대의 허락을 받은 이 마을 어민들이 특정 시간대에 한해서 어업을 나갈 수 있다고 하니 분단의 아픔을 김포에서 한번 더 느끼게 한다.
전류리 포구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으로 서해에서 자라다가 한강하구와 임진강에서 올라오는 황복이 잡히기도 하고 많은 어류가 잡힌다고 한다. 맞은편 너머에 북한의 개풍군이 위치해 있기에 조류를 잘 못 타면 북으로 넘어갈 수 있어서 27척의 허가된 어선만이 해병대의 감시하에서 눈에 띄는 붉은 깃발을 달고 조업에 나선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어판장에서는 참게와 숭어, 농어 등 신선한 수산물을 팔고 있어서 그래도 항구로서 기능은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농어와 숭어를 회로 떠서 한 잔 하고 싶었지만 건너편에 있는 철조망이 시야를 가리며 분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니 흥취감도 사라지고 목이 메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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