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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민의 삼국지

삼국지 도시 소개(7)-업성(邺城)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의 명물 동작대의 복원도

삼국지에 나오는 대부분 도시들이 비록 위치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그 명칭과 도시의 명맥이 잘 남아있습니다. 낙양, 시안, 청두, 난징들이 바로 그 도시죠. 하지만 유일하게 원소의 근거지이자 조조의 후반부 근거지였던 업성은 초라한 시골마을로 남아있습니다. 가는 길이 다소 불편할 수 있고, 거의 대부분 터만 남아있지만 다른 삼국지 유적이 테마파크화 되어서 원형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반면 업성은 예전의 정취가 잘 남아있습니다.

안양 근교에 업성터가 남아있다. 하북성에 속해있지만 실제론 하남성에서 접근해야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하북성에 속해있지만 실제로 접근하려면 허난 성의 안양에서 접근하는 게 편합니다. 안양은 중국 10대 고도에도 손꼽히는 장소이고, 특히 갑골문자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전설상으로만 존재했던 은나라가 실제 역사로 인정받게 만든 장소이기도 합니다. 은허라고 불리는 유적이 안양에 있습니다. 거북 등껍질에 새겨졌던 갑골문은 물론이고, 은나라의 종묘와 왕릉 유적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발견된 사모 무정은 세계 최대의 청동기로 무게가 875킬로가 나간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과 말이 순장되었던 갱들도 살펴볼 수 있죠.

세계최대의 청동기 모형 사무무정의 모형과 은허 종묘유적전경
은허에는 수많은 말과 사람이 순장되어 있다.
은허가 자랑하는 거북이 등껍질에 글씨를 세긴 갑골문

여기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 쯤 가다 보면 한단시에 속해있는 린 장현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20킬로 정도 드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을 풍경 삼아 낡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조조의 동상이 반겨주는 업성 유적지에 도착합니다. 조조가 원소를 무너뜨린이후 죽을 때까지 16년간 근거지로 삼았고, 이후에 370년 동안 6개 왕조의 도읍으로서 북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습니다.

조조의 동상이 당당히 서있는 업성유적지의 입구

조조의 근거지 업성이 당시 한 헌제가 머물던 도읍 허창보다 더 크고 번성했다는 기록조차 있을 정도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조조는 당시 도시를 건설할 때 화려한 궁궐뿐만 아니라 삼대의 건설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삼대란 조조가 지은 거대한 누각 3개를 말하는데 당시 서쪽 성벽에 금봉대, 동작대, 빙정대를 세웠습니다. 조조가 북방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기주로 돌아온 당시, 남쪽 땅속에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군사를 시켜 그곳을 파 보았더니 구리로 만든 동작 새가 나와 기념하기 위해 동작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작대를 재현한 테마파크

이곳은 왕실의 연회장뿐만 아니라 성벽 수비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갖추어 조조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각 누각의 높이가 금봉대와 빙정대가 24미터 중간의 동작 대가 30미터에 이르고 방이 100칸씩 있었다고 전해지니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세 봉우리의 산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 대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시켰다고 하니 업성이 난공불락의 인공 요새라 불릴만했다고 생각합니다.

3개의 대중에 그나마 터만 남아있는 금호대

그래서 수나라를 세운 양견이 누군가 이곳을 터전삼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흔적도 없이 몽땅 불태워 지금에 이르게 된 거지요. 조조가 세웠다는 3개 누각 중 유일하게 그 터만 10미터 정도 남은 금호 대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정상에서 업성 유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죠. 60미터 정도 걸어가면 3미터가량 흙무더기만 남아있는 동작대 터도 볼 수 있지요. 성안은 대부분 옥수수밭으로 되어있고 성벽도 거의 무너져 버렸지만 뒤편으로 가면 전군 동이라고 해서 유사시 군사들을 이동시켰다고 하는 지하통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작대에서 조조는 많은 문인들을 모아 놓고 함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예술을 즐겼습니다. 당시 조조는 유재 시거 오득이 용지(오로지 재주가 있는 이를 천거하면 나는 그를 등용해 쓰겠다)는 정책 아래 전국애 서 유능한 문인과 학자들을 동작대로 불러 들어 그 재능을 펼치도록 했습니다.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중원이 어지럽던 시절, 문인들은 조조 덕분에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고, 덕분에 건 안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길 수 있었죠.

업성의 예전 번화했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업성의 도시설계는 향후 장안성과 자금성, 그리고 일본 나라 헤이죠코 궁의 구조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고대 건축사에 이정표를 남겼다고 하니 비록 터만 남았어도 상상을 하며 그때 그 당시의 영화를 되새겨 보는 거죠.

업성의 도시구조는 일본의 나라에 위치한 헤이조쿄까지 영향을 끼쳤다.

업성 근교 삼대촌에 가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조조의 무덤에 갈 수 있습니다. 조조는 살아생전 72개의 묘를 만들어 자신의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연의의 허구 이고 실제로 유언에 의하면 무덤을 소박하게 하고 재물을 넣지 말라고 했었죠.

조조묘라 알려진 장소에서 발굴된 모습
늘 위치에 관해 논란이 있는 조조의 고릉

조조의 무덤 진위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2018년 조조의 무덤이 맞다고 공식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관광지화를 위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택시를 타고 공사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조조의 무덤을 찾아갔지만 대절한 택시기사도 조조의 무덤은 가짜가 분명하다고 하고 조조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장소가 여러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총길이는 60미터로 꽤 규모가 크고 묘주가 살아생전에 쓰던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어 꽤 검소하다고 합니다.

 

공사현장에 도착했지만 고고학 전문가만 들어갈 수 있다고 출입을 엄금하고 있었고, 무덤 전체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위나라 테마파크로 만드는 중이라고 합니다. 내년 3월에 정식 개관하면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조조의 무덤이 맞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