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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민의 삼국지

삼국지 도시 소개(9)-후베이성 상양(襄阳)

한수를 마주보고 있는 양양성의 자태

예전 형주의 중심지였던 양양, 지금은 상양으로 이름이 바뀐 그 도시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유명한 우한이 있는 후베이성 후베이 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유표가 양양성을 거점으로 다스렸죠. 양양성의 남쪽에 지금 형주시로 이름이 바뀐 강릉성이 있습니다. 마침 양양과 강릉의 한자가 강원도의 양양과 강릉이랑 같습니다.

 

양양은 2010년까지 양번이라 불리다가 상양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수를 사이에 두고 삼국지의 그 유명한 번성이 북쪽에 있고 남쪽엔 양양성이 있죠. 그 두시가 하나로 합쳐져 양번과 상양이 된 겁니다. 지금은 인구가 570만으로 우한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위치 자체가 교통의 요지고, 특히 강동지역으로 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남쪽을 본거지로 삼은 왕조들은 양양성을 엄청 중요시했습니다.

양양성과 번성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상호 보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몇년동안 끊임없이 남송을 정벌하려 시도하는 몽골군, 그들에게 양양성은 큰 장벽이었다.

후에 남송 시절 양양은 육조시대 이래 남쪽 한족 왕조들의 군사적 요충지인 형주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장강-회하 유역 사이에서 북방민족을 방어했던 남송 시대에 양양은 침략하는 입장에선 심히 곤란한 성이었는데, 성곽은 튼튼하며 주변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어서 기마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방어선을 튼튼히 다져서, 당시 금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최강이었던 원나라 군세도 여기서 막혀 남송 공략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 이슬람 기술자를 초빙하여 개발한 회 회포를 이용하여 6년을 포위한 끝에 결국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양 공방전의 패배는 남송의 멸망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양양은 지금도 성벽이 남아있지만, 특히 유비의 근거지였던 신야가 북으로 40킬로 밖에 떨어져 있고, 삼고초려의 현장인 고융중이 있어 삼국지 덕후들 사이에서 꼭 가봐야 할 삼국지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죠.

고융중의 입구 패방

제갈량이 은거했다는 고융중 그 위치에 대해 후베이 성의 상양 시와 하남성의 남양시가 엄청나게 다투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치열하나면 한국학자가 상양시 삼국지 포럼에 초대되어 제갈량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융중의 위치에 대해 상양에서 온 학자와 남양에서 온 학자가 몸싸움을 펼칠 기세로 싸움을 하고 있던 거죠. 한국학자는 그 위치가 뭐가 중요하나, 그 보다 중요한 건 제갈량의 정신을 기리는 게 아니겠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다음날부터 한국학자는 푸대접을 받게 되었고, 얼마 안 가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상양은 제갈량의 도시답게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갈량 광장도 있고 파초선을 든 거대한 제갈량의 동상도 볼 수 있죠. 기차역 앞에서 512번이나 여행객 전용버스를 타고 가면 한 시간 만에 고융중 여행자 전용 센터에 도착하게 됩니다. 중국의 여행지를 가보면 일반버스나 차로 관광지 외곽에 있는 여행자 센터밖에 못 가게 되고, 입구까지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비싼 돈을 주고 관광지까지 가는 전용버스를 타거나 한창을 걸어가야 합니다. 문화재 보호를 면목으로 하는 조치라곤 하지만 너무 장사 속이 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갈량광장에 우뚝 서있는 제갈량의 동상
여행객들은 여기 서비스센터에서 표를 구입해 전용버스를 타고 고융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제갈량이 17세부터 유비를 만난 27세까지 학문을 닦으며 은거했던 고융중은 1940년대 장제스 국민당 총통의 기부를 바탕으로 개발돼 지금까지 관광객을 맞고 있습니다. 입구를 지나 먼저 고융중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석조로 된 문이 보이는데 고융중이라는 현판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갈량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영정치원 ‘마음을 다해 공부를 해라’ 담박명지 ‘마음을 비워야 원대한 꿈을 가질 수 있고 마음이 안정돼야 꿈을 펼칠 수 있다’ ‘담박명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조물 뒤편에는 삼대 하일인 이라는 찬사의 문구가 나옵니다. 이 글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의 글로 하, 상, 주나라 3대의 흥망을 거치며 태어난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찬사입니다. 양옆으로 제갈량이 지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 뛰어나다는 두보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금 지나면 제갈량이 농사를 지었다는 밭이 나오고 가운데 비석이 궁경롱무라고 쓴 비석이 나옵니다. 제갈량의 꿈이 천하를 안정시키고 고융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는 것이라고 하죠.

제갈량이 농사를 지었다는 궁경지

다음으로 조그마한 석교 ‘소홍교’가 나온다. 유비가 제갈량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제갈량의 장인을 보고 제갈량으로 착각해 넙죽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원래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으나 후대에 돌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소홍교를 지나면 돌계단을 따라 유비가 은거 중인 제갈량을 찾아왔던 삼고로가 쭉 이어집니다.

 

삼고로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가 나타납니다. 무후 사는 중국 전역에 48군데나 있어 관제묘 다음으로 많죠. 여기의 무후사가 성도 무후사에 이어 두 번째 큰 규모로 1000년 전부터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에는 제갈량의 동상이 있는데 이 동상은 유일한 실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1981년 후손들이 398킬로의 동을 들여 제작한 것입니다. 제갈량의 손은 행운을, 부채인 백우선을 만지면 지혜를 준다는 믿음에 반들반들하죠. ‘삼고 유지’라고 쓴 두 번째 전각에는 청나라 말 지식인 궈모뤄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며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시가 남아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전각을 연결하는 과전에는 양 옆으로 동상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이 동상들은 제갈량과 운명을 함께했던 인물들로 왼편으로는 방통과 백미로 유명한 마량 등 6명의 문신이, 오른편에는 문무를 겸비한 요화 등 6명의 무신이 도열해 있습니다.

무후사 내부에 있는 제갈량의 상
무후사의 중심 삼고당으로 가는 입구

무후사를 나오면 오른쪽에 초가가 나오는데 이 초가는 1984년 방송국의 드라마 촬영 현장을 위해 보존해놓은 것으로 실제보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고 하죠. 초가를 내려오면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현장인 삼고당이 나옵니다. 이곳은 청나라 때 조성된 곳으로 제갈량의 출사표와 유비와의 대화 등을 적어 놓은 글로 장식돼 있습니다. 그리고 초고정을 지나면 주견숙묘라고 쓰인 비석이 나옵니다. 이곳이 진짜 제갈량의 옛 초가가 있던 곳입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6대손인 주견 숙은 풍수지리에 빠져 제갈량의 초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자성이 이곳을 차지한 후 훼손돼 흙무더기만 남아있습니다.

제갈량의 초당을 재현해 놓은 장소, 실제 초당은 아니고 방송국팀이 촬영을 위해 재현한 곳 이다.
제갈량의 진짜 초당 유적 명나라 왕이 자신의 묘터로 삼기 위해 파괴했었다
이자성에 의해 묘는 파헤쳐지고 터만 남은 초당유적지

그리고 상양에는 강을 경계로 강북지역엔 번성터가 있고, 최근에 복원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남지역에는 양양 고성이 남아 있죠. 한수 강을 마주 보고 있는 북쪽에 3개의 성문이 자리 잡고 있고, 나머지 세 방향으로 성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특히 이 세 방향에는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해자를 건설해 놓았는데 최대 250미터 넓이에 평균 180미터 정도 됩니다. 현존하는 중국의 고성 중에서도 가장 넓은 규모로 성벽에 올라가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죠. 양양 고성은 삼국시대 당시 유표의 근거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20여 차례나 전란을 치른 곳입니다.

 

둘레만 7킬로가 넘고 현재의 건물은 명청 양식입니다. 북쪽의 임 한문은 가장 완벽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민가는 물론이고 현대와 전통을 조화시킨 상가가 많아 성안을 둘러보는 것도 좋죠. 대만만 우육면이 유명한 게 아닙니다. 양양의 우육면도 상당히 유명합니다. 꼭 맛보시길 바랍니다.

양양성의 거대한 성벽
양양성 앞의 한수로 인해 자연해자가 형성되었다
양양의 명물 우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