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가볼 장소는 안후이성의 보저우입니다. 안후이성은 난징, 쑤저우가 위치한 장쑤성과 우한의 후베이성 사이에 있어서 존재감이 애매하긴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중국의 명산인 황산이 안후이성 남부에 있습니다. 약칭으로 보면 환(皖, Wǎn)으로 원술의 근거지이자 삼국지에선 종종 나오는 지명으로 익숙합니다. 안휘성의 정 가운데엔 회수와 장강이 교차하며 흐릅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기도 했지요. 특히 안후이성의 성도인 합비에서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습니다.
안후이성은 북쪽과 남쪽은 문화적으로 꽤 차이가 많이 나는데 북쪽과 중부는 평야가 많고, 고대부터 중원의 일부로서 자리했습니다. 남부는 산지가 많고 일명 휘상이라 불리는 상인집단이 발달했지요. 산서성의 진상과 함께 중국전체의 경제를 휘어잡았습니다. 화이허강은 귤화위지(橘化爲枳)나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라는 속담과 같은 뜻이다. 회남에서는 귤이 나고 회북에서는 탱자가 나기 때문. 또한 회수 이북으로는 주로 밀을 재배하고 이남으로는 쌀을 재배하기로 유명하죠. 이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요.
보저우는 안후이성의 제일 북쪽에 위치해 있고, 하남성과 붙어있습니다. 보저우에서 동쪽으로 가면 장쑤성 북부의 쉬저우시가 있습니다. 한자 그대로 읽으면 서주라고 하는 동네죠. 여기도 삼국지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그런 도시로 유명합니다. 현재는 삼국지 유적보단 일명 미니 병마용이라 불리는 손가락 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사자산 초왕릉이 유명합니다. 여기 근교에는 풍현과 패현이 있는데 유방의 고향으로 유명해서 함께 묶어 풍패지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주에 가면 풍남문이 있고, 가장 번화한 동네인 객사길의 객사의 명칭이 풍패지관인걸 보면 우리나라 전주와 서주의 연관성을 알 수 있지요.
각설하고, 안후이성의 북부에 위치한 보저우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박(亳), 초(蕉) 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라 시절에 나뉜 구주에서 예주에 속했지요. 조조와 화타를 비롯해 도덕경을 쓴 노자, 하후돈, 하후연등 ‘중국 역사 명인 대사전’에 언급된 인물만 1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죠. 우선 화타의 고향 보저우 답게 중국최대의 약재시장이 보저우에 위치해 있습니다. 2600여종의 약재를 볼 수 있고, 보저우 주변에서 약재를 재배하는 마을은 800여곳에 달한다고 하죠. 뱀이나 파충류나 양서류는 기본으로 심지어 태아의 태반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사람들도 약장수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사기를 잘친다고 하니 구경만 하시고 직접 사거나 하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장소는 화조암인데 화타를 위해 지어진 사당으로 해마다 화타를 기리는 제사가 이곳에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화타는 조조에 의해 죽게되는데 화타가 죽은 뒤 조조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며 화타의 고향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웠죠. 정전에는 화타의 상도 있지만 기념관에서 화타가 행했다는 독특한 5가지 동작을 볼 수 있는데 이 동작을 가리켜 ‘오금희’라고 부릅니다. 오금회는 화타가 창조한 도교의 기공수련으로 호랑이, 새, 원숭이, 곰, 사슴 5개 동물의 동작을 본떠 건강을 수련하게 했습니다.
호랑이의 동작은 폐를 좋게 하고, 곰의 동작은 간을 튼튼하게 하고, 사슴의 동작은 신장을 좋게 하고, 새의 동작은 심장을 튼튼하게 만들고, 원숭이의 동작은 비장을 좋게 합니다. 화타는 오금회를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들중 오보가 <<오보본초>>를 써서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화타가 죽은 뒤에는 보저우를 중심으로 수련자가 꾸준히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또 기념관에는 거대한 바위가 전시되어 있는데, 보저우에서 발견된 것으로 돌의 형상이 마치 화타와 닮았다 해서 ‘화타기석’ 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다양한 한약재들과 보저우의 특산품인 구징궁주 등이 진열되어 있죠. 또한 후원에는 정원이 있는데 이 곳에 심어진 식물들은 전부 약재라고 합니다.
보저우는 조조의 고향인만큼 조조의 흔적이 심상치 않게 남아있는데요. 지금도 근교에는 조씨 집성촌인 차오위안촌이 있습니다. 조조의 생가가 있는 걸로 전해지나 지금은 평범한 마을이지요. 하지만 시내 한복판에는 조조의 군사요새의 결정판이 있습니다. 조조운병도라 불리는 곳인데,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제후군을 모았으나 실패하고 돌아온 조조는 고향에 돌아와 다시 군대를 조직했지만 수적으로나 전술로나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만든 것이 바로 지하 운병도였습니다. 땅굴을 파 사방으로 길을 내고 군사들로 하여금 성 안팎으로 연결된 지하통로를 통해 반복해서 들고 나게 했습니다.
지하상황까지 알 수 없는 적군들의 눈에는 적은 수의 군대도 수만 대군으로 비춰질 수 있는 대단한 전략이었습니다. 지
하운병도를 이용해 적군의 눈을 속이며 조조는 점차 세를 확장해 나갔고, 시간이 흐르며 권력의 축은 조조에게 욺겨왔지요. 입구는 정말 조그마하지만 내부의 길이는 정말 놀랍습니다. 지하 2~5미터 깊이에 만들어졌으며 총 길이가 8킬로에 달해 지하장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현재 800미터만 외부에 공개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운병도의 진면목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내부는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고, 내부는 컴컴한데 주의 할점은 천장의 높이가 구간마다 다릅니다.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마련한 장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래와 위로 길이 나눠지다가 다시 합쳐지기도 하는데 군사를 신속하게 투입할 때 쓰기 위한 통로라고 합니다. 운병도 내부 통로는 평행단행도와 상하단행도, 쌍인도, 순환도 4가지로 나뉩니다. 중간 중간에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과 지상에 있는 환기구와 연결되는 통로라고 하죠.
어떤 지점에는 ‘함정’이 갑자기 나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자리에 날카로운 쇠가시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목적에 따라 설치해 놓은 함정과 장애물을 설치하기 위해 발목높이에 파 놓은 홈, 무기 저장고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지하운병도는 조조의 지략과 용병술이 최대로 발휘된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저우 시 중심엔 조조의 시호인 위무제의 이름을 딴 위무광장이 있고 부근에 10기가 넘는 분묘군이 있습니다. “조조종족묘군” 즉 조조 가족의 무덤이 있습니다. 원래는 지하에 묻혀있다가 보저우시 개발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고증을 거듭한 끝에 조씨 가문의 ‘가족묘’임이 밝혀졌고, 조조의 증조부 조절과 조부 조등, 부친 조숭, 사촌 조인등이 이곳에 묻혀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현재 개방되어 있는 무덤은 조조의 할아버지이자 환관인 조등의 무덤입니다. 어린나이에 입궁해서 30년간 5명의 황제를 모시고, 환제 시기 태감직에 오르면서 권세위에 군림하게 되었죠. 그 당시 권세를 누린 환관만이 양자를 얻을 수 있는데 조조의 부친 조숭이 그의 양자였습니다. 조등은 생전에 보저우성 남쪽 토지를 자신과 후대가 묻힐 곳으로 정했고, 특히 자신의 묘 조성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썻습니다.
묘 내부는 조등의 관이 안치됐을 것으로 보이는 주실을 비롯해 총 7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심지어 사후 세계를 위한 화장실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중 6개의 방은 석회암으로 만든 벽돌을 쌓았는데 석회암은 보저우 일대에서 나지 않는 희귀한 돌이라고 하니 당시 조등의 권세가 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현실 안쪽에는 지금도 조등이 입은 수의인 금루옥의를 볼 수 있습니다. 보저우에 오시면 앞서 소개한 고정공주도 마셔보고 조조닭의 본 고장이 보저우니 한번 드셔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운민의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도시 소개 (19) - 랑중(阆中) (1) | 2021.03.29 |
---|---|
삼국지 도시 소개(17) - 양저우(扬州) (2) | 2021.02.24 |
삼국지 도시 소개 (16) - 전지앙(镇江) (2) | 2021.02.24 |
삼국지 도시 소개 (15) - 난징(南京)2편 (3) | 2021.02.17 |
삼국지 도시 소개(14) - 난징(南京)(1) (2) | 2021.02.17 |